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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절 | 두번째 한국방문중 어머니의 불의의 사고
06-07-29관리자7,913회

2003년 3월 9일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이유는 평상시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갑작스레 불의의 사고고 머리를 크게 다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사고라는 것이 다 그렇겠지만 예고없이 뒤통수를 때리는 것마냥 심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점에서 정말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기간동안 그 사람은 한국에 사업차 방문중이었답니다.

 

목포에서 광주 전남대학병원으로 어머니가 후송되고 뇌수술을 하신 연후에 저는 그와 함께 어머니 병문안을 갔더랬습니다. 평상시 어머니와 잉꼬처럼 다정하셨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고로 큰충격을 받으신데에다 병간호까지 자청하고 계셔서 너무 힘들어하셨는데, 딸이 느닷없이 키작은 웬 외국남자를 떠억하니 데려오니 기가 막히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제게 아버지가 놀라시니까 그냥 친구라고만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저는 그대로 얘기하였으나 아버지는 반신반의하시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이유는 그동안 남자얘기를 하적도 데려온 적도 없는데 그냥 친구라니..몇번 물어보시고 대전으로 돌아온 후에도 전화하시어 어떤 사람이냐고 다시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서울에 사업일로 몇차례 다니고 사촌동생과 친구들을 만난뒤 다시 네팔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는 수술후 목포에 있는 병원으로 다시 후송되어 간단한 수술을 다시 받으셨는데, 이것이 잘못되어 수술을 두번이나 더 받게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연세많으신 분인지라 회복을 하시지 못하고 병상에 오랜기간 누워계시게 된 것입니다. 말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며 겨우 눈빛으로 의식이 있는지여부를 살펴봐야 하는 상황이 오래 계속 되었습니다. 나는 매주 일요일 대전에서 목포까지 어머니병문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개월동안 계속되는 병문안중에 가족들모두가 어머니가 편찮으시고 회복이 쉽지 않은 것 같으니 어머니살아생전에 결혼을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사고후 매주 애타고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마를새가 없었습니다. 좀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 어머니를 이곳저곳 모시고 다니며 맛난 것, 재미난 것, 좋은 것을 같이 해드리지 못한 것, 자주 못찾아뵌 것, 애꿎게 어머니한테 성질부린 것, 근사한 생신상한번 내 손으로 직접 차려드리지 못한 것등등... 병간호하시며 힘드신 아버지도 불쌍하여 어찌할바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이제 언제 어머니가 쾌유하시더라도 나로 인한 걱정은 없게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지점에 이르러 그러면 지금 내가 결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사람이어야한다고 생각했고, 현재 내게 있는 사람은 라케스인데...

 

이 시점에서 이제 여러가지 현실적인 벽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외국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결혼하게 되면 생활은 어디에서 할 것이며 자녀는 어디에서 키울 것이며등등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그래서 나는 매일 잠을 못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래도 결론은 하나 결혼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하고 원하는 사람과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메일과 메신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생각과 나의 이런 어려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시 만나자고 기약했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결혼을 할지말지 결정하기 위해 다시 네팔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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